서울북부지법 2004. 10. 22. 선고 2004고합228호 사건 (재판장 박철 부장판사) 판결문
중 <판사유감>에 실린 발췌 부분
(...) 무릇 사람들의 반응이 동일한 상황에서도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칼로 찌르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뺨을 맞고도 참을 줄 안다. 무섭게 노려보는 것만으로 겁을 먹고 몸이 얼어붙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칼을든 상대방에게 용감히 저항하기도 한다. 강간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평생 안고 어렵게 살아가거나 심지어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모멸적 기억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훌륭하게 이어가기도 한다.
범죄에 직면한 피해자가 보이는 반응과 피해를 입은 후 피해자가 보이는 반응의 다양성을 보편적 지식의 틀안에서 참작할 때 특정 사건에서 피해자 반응에 특이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나이, 성별, 성격, 문화적 배경과 개인적 경험은 물론 범행 당시와 범행 이후의 여러 정황을 모두 고려하여 이러한 반응의특이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지, 피해자 반응의 특이성의 형식적 측면만을 들어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가볍게 배척한다면 이는 복잡하고도 다양한 인간 심리와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흠흠신서> 서문에서 “사람이 하늘의 권한을 대신 쥐고서 삼가고 두려워할 줄 몰라 털끝만한 일도 세밀히 분별해서 처리하지 않고서 소홀하게 하고 흐릿하게 하여, 살려야 되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또는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 흠흠이라 함은 무엇인가? 삼가고 또 삼가는 것은 본디형벌을 다스리는 근본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피고인의 진술을 경청하고, 엄격한 증명에 의하여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 여부를 판단하며 검사가 제시한 증명에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다면 마땅히 무죄추정을 받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여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법관의 의무겠지만, 만에 하나 피해자 반응의 특이성이 여러 사정과 정황에 비추어 합리적으로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지를 주도면밀하게 따져보지 않은 채 피해자 반응에 특이성이 보인다고 하여 곧바로 피해자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백 명의 죄인을 석방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만들지 않아야 한다”라는 법언에서 쉽게 도피처를 찾는다면 어찌 형벌을 다루는 법관의 도리를 다하였다고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흠흠하기를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강간사건에서 강한 폭행, 협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는 강간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외부로 표출된 가해 남성의 범죄적 악성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피해 여성의 내면적 심리와 공포를 도외시한 견해이며, 통상적인 강도죄와 강간죄의 장소적, 정황적 차이를 간과한 견해이고,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정서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견해이며, 어쩌면 정조의 가치를 목숨처럼 중하게여겨서 여성들이 목숨을 걸고 정조를 지키던 봉건적 시대의 잔상이나 남성 중심의 사고체계를 떨쳐버리지못하였기 때문에 갖는 견해일 수도 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남성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혼자서 승강기를 탈 때에도 불안감을 느끼고, 밤늦게 택시를 탈 때에도 불안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여성들이 약한 정도의 폭행, 협박에 대해서도 쉽게 공포심을 느끼고, 공포심에 몸이 얼어붙고, 목이 막혀 소리치지 못하고,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저항이 없기 때문에 더 강한 폭행, 협박이 있었지만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에 이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무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 강력한 폭행, 협박을 행사하지만 않으면 여성의 명백한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완력으로 여성의 옷을 벗기고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법원은 그러한 생각은 틀렸다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강간죄를 구성하는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폭행, 협박’이 있었는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표출된 가해자의 폭행, 협박의 내용과 정도만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시 정황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행, 협박에 대하여 저항할 경우 더 강한 폭행이초래될 것으로 예상하였고, 당시 정황에 비추어 피해자의 예상에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실제 사건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행, 협박에 대하여 적극적인 저항이 더 강한 폭행을 초래할뿐 강간의 피해를 막을 수는 없겠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인 저항을 포기하였고 그 판단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강한 폭행, 협박이 실제로는 표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강간죄를 구성하는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에 해당한다는 것이 이 법원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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