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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impression/영화 movies

미키는 죽으면 재인쇄되지만 우리는 아니라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공포이다 | <미키 17> 감상문

by dinersourfizz 202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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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3.월

극장에서 관람

 

감독: 봉준호

장르: SF, 드라마, 코미디

제작사: 플랜 비 (PLAN B)

 

 

 

 제목에도 언급했듯이 주인공 미키는 재생산되는 복제인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죽어도 우리의 자리를 타인이 대체한다. 그것도 아주 쉽게. 내가 죽으면 가족과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나 슬프고 상처가 되겠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큰 일이 아닌 것이다. 일상처럼 전 세계에서 1초에 한 명씩 죽는다고 하니까.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고들 하니까.

 특히나 사용자-사용인의 관계에서는 나는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노동자일 뿐이다. 여기에서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공포를 느꼈다. 재수없게만 느껴졌던 친구 티모의 말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물론 티모는 순진한 미키를 이용해먹는 나쁜 놈이 맞지만 티모 입장에서는 자기는 죽으면 끝, 미키는 계속해서 부활하니 불멸의 존재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다시 태어난다고 해서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닌데 영화 속 모두가 미키의 아픔을 모른 척 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걸 넘어서 죽고 다치는 것을 구경하며 유희로 여기기도 한다. 대체 왜? 미키가 너무 안쓰러웠다. 꼭 안아주고 싶었는데 나샤가 피에타 상처럼 가스를 맞고 죽어가는 미키를 안아주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매순간의 죽음이 전부 외롭지는 않았을거다. 하지만 나샤는 정말로 모든 미키의 죽음을 목도하면서도 그 모든 미키가 똑같은 미키라고 느꼈을까? 나샤는 줄곧 미키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데 그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미키가 죽는 걸 반복하는 인간이라 그저 특별하게 여겨졌을까? 마샬컵을 5회나 우승한 인재가 왜 목숨을 걸어가면서 별볼일 없는 미키를 지키려 했을까? 나로선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랑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면 평범한 미키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자친구도 아닌게 왜 나서냐고 볼 수도 있겠지. 남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사랑말고는 당위성이 없으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그게 이 세상에서의 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키의 끝은 어디일까?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미키 17이 18을 만나기도 전에, 17은 이미 16번의 죽음을 겪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일 뿐이다.  17이 16번 죽었다기에는 직접 죽음을 겪지 않고 죽음 뒤에 재인쇄된다. 누가 전해주었을 뿐 미키 2,3,...18 모두 다 처음 겪는 죽음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미키를 17번 살려낸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사람을 16번이나 죽인 것이다.(미키 18은 스스로 죽었으니까 제외.) 이런 악마같은 새끼들을 보았나...

 하나의 미키가 죽어야 그 다음 미키가 태어난다. 멀티플은 일어나면 안되는 재앙이니까. 하지만 미키를 동시에 인쇄한다고 가정해보자. 한번에 스무명의 미키를 인쇄한다면? 그 스무명의 미키는 모두 같은 사람이라고 해야하나? 나는 이 딜레마의 정답을 크리퍼가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크리퍼를 바라보면 그들은 모두 다 똑같고 징그러운 벌레같이 생겼다. 크리퍼는 다 똑같이 생겼지만 마마 크리퍼가 미키에게 알려주었듯이 각자 이름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인 것이다. 미개한 인간들은 크리퍼가 혐오스럽게(creepy) 생겼다는 이유로 이름을 지들 마음대로 creeper라 지어 부르고 함부로 그들에게 총을 갈기고 아기 크리퍼의 꼬리를 잡아빼 소스를 만들어 먹었지만 그들은 이미 인간(그들에겐 외계인)의 언어를 깨우친 고등 생명체였다. 크리퍼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통역기가 필요했지만 크리퍼는 통역 없이 인간의 언어를 깨우쳤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게다가 각자 이름이 존재한다니. 그렇담 똑같이 생긴 미키 17,18도 당연히 다 다른 인간이여야만 한다. 봉준호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보였다. 그래서 안타깝게 대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진 미키 18도 미키 17이 온전한 미키 반스로 살아갈 수 있게 아름답게 퇴장시킨 것이다. 원작인 '미키 7'을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미키 8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영화에서 미키 18을 살리려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다. 그냥 쌍둥이처럼 17과 18이 공존하는 결말도 존재했을 것이다. 봉준호가 모든 미키들을 가엾게만 여겼다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18은 영화 내내 그랬듯 그동안의 미키와는 달랐다.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지도 않고 17이 당한 불합리에 분노하며 처음으로 체제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나샤를 독차지하려는 17과는 달리 그런 17을 귀여워하듯 셋이 즐기자고 하는 호방한 성격도 갖추었다. 미키 18은 17보다는 "그래도 나는 너이고, 너는 나야"라는 생각을 하는 미키였던 것 같다. 그러나 미키 17은 18을 보며 자기와 다름을 깨닫는다. 그래서 17이 살고 18이 죽는 결말이 날 수 밖에 없던 것 같다. 

 

 봉준호가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것을 감수하고도 미키와 마마 크리퍼의 대화를 오래 담은 걸 보면 그 대화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던 것 같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크리퍼의 이름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크리퍼라 했으니 크리퍼구나 한다. "쟤네가 이름이 있어봤자 징그러운 외계 생명체지 그게 뭐가 중요해."하고 여기지만 미키만이 크리퍼의 원래 이름을 궁금해 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읽으면 나오듯이 이름을 불러 주어야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미키 또한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마샬은 미키를 익스펜더블(소모품이라는 의미. 사람한테 대놓고 소모품이라니 미친새끼.)이라고 부르고 나머지는 숫자로만 부를 뿐이다. 아무도 미키를 미키 반스라고 불러주지 않지만 나샤만이 그를 미키 반스라고 불렀다. 그래서 미키가 나샤를 사랑을 넘어 존경해마지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도 모르게 익스펜더블로 살고 있다. 죽지 않아도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직업을 잃게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생계의 위협을 받으면 그 또한 곧 죽음과 다를게 없다.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는 주변의 많은 죽음에 의문과 분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왜 그렇게 죽었어야만 했는지, 왜 그렇게 다쳤어야만 했는지 따지고 화내야한다. 자꾸 뉴스에 나오는 숫자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우리는 숫자로 대체될 수 없는 김공룡, 봉준호, 미키 반스, 로버트 패틴슨이다. 우리는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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