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0.토
극장에서 관람
감독: 박영주
장르: 드라마
제작사: 씨제스 스튜디오, 페이지원필름
※ 주의 ※
후기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실화나
어떠한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들은
이 글을 읽지 않는 걸 추천드립니다.
다만 영화가 재미있을지 궁금해서 검색을 하셨거나
볼까 말까 고민이 되신다면
볼 만한 영화였으니 꼭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특히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꼭 보고 경각심을 갖길 바라며,
혹은 보이스피싱과 같은 사기의 피해자라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이 영화를 보고 조금이나마
본인의 잘못이 아님을 위로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설날을 맞이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를 했다. 혼자 보는 게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볼 영화를 찾는데 꽤 애를 먹었다. 일단 선정적인 영화는 무조건 안 되고, 잔인한 영화는 내가 싫고. 그래서 선택한 게 라미란 배우 주연의 이 영화였다. 나에게 라미란 씨는 믿고 보는 배우라서, 그가 나왔던 영화 '내 안의 그놈'이나 '정직한 후보'처럼 가벼운 액션활극 코미디 영화인 줄 알고 고른 건데 웬걸... 이거 완전 범죄도시 아니야? 생각보다 영화가 어둡고 너무 잔인해서 놀랐다. 쓸데없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을 길게도 자세히도 보여준다. 관객이 왜 사람이 피떡이 되어 죽어가는 과정을 가해 시점에서 봐야 하는지...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도 그렇고 영화 '헤어질 결심'도 그렇고, 여자가 얼굴을 맞는 장면을 오래오래 보여주는 미디어는 결코 좋게 볼 수가 없다. 대체 누굴 충족시키려는 건지 이해가 안 가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 가장 만족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누가 봐도 감독이 그걸 제일 즐기고 있다. 나는 폭력적인 영화를 싫어해서 더욱더 참을 수가 없었다. 영화감독들은 세련된 연출법을 알면서도 말초적인 감각을 추구해서 자극적인 장면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괘씸하다. 굳이 피해자가 피떡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연출만으로도 끔찍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누군가를 때리는 그림자를 보여주거나,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의 얼굴을 내내 비추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피해자에 이입하고 충분히 공감한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상상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관객에 상상에 맡기지 않고 모조리 다 보여주는 영화는 친절한 게 아니라 관객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열린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범죄를 묘사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서사에 필요하지 않은 과도한 연출은 역겹기만 하다.
보이스피싱 사기범을 직접 잡은 김성자 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된 '시민덕희'는 실화가 더 영화 같다. 실제 주인공은 돈도 못 돌려받고 경찰의 외면에 상처도 받았지만 그걸 이겨내고 홀로 싸워 이겼다. 그러나 실화 속 빌런이었던 경찰은 영화 속에서 면죄부를 받는다. 바쁜 업무에 치여 피해자를 외면했지만 젊을 적 열정을 되찾고 주인공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형사... 이게 맞나? 이거야 말로 판타지 아니야? 우주를 지키는 아이언맨보다 어쩌면 더 허구같이 느껴진다. 물론 총책이라는 원죄자가 존재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경찰이다. 피해 사실을 알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해자들이 구제받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게 정녕 공권력이 가진 힘인가? 매번 일손이 부족해서, 예산이 부족해서, 시간이 없어서, 정보가 없어서... 그러면 경찰이 왜 존재하고 행정은 왜 있는가? 너무나 답답하고 화가 나는 현실에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이 영화에는 사기범과 사기피해자 말고도 또 다른 피해구조가 나타나는데, 바로 콜센터 직원들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쪽은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오로지 피해자이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로 꼬셔서 젊은 남자들을 납치, 감금하고 폭행까지. 심지어 죽여버린다. 이들은 콜센터에 들어오자마자 전화와 여권을 뺏기고 굶겨지고 죽도록 맞는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감히 도망치거나 반항을 할 수가 있을까?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예전에 법학 수업에서 배웠던 긴급피난이 생각이 났다. 위난에 빠진 법익을 위해서 다른 법익 침해하지 않고서는 달리 피할 방법이 없을 때를 긴급피난이라고 한다. 피해 청년들은 옷이 벗겨져 영상까지 찍는데 그 내용은 정말 더 처참하다. 자신이 잘못하면 가족이 벌을 받는다는 말도 안 되는 계약이었다. 이것은 애초에 법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협박으로 쓰인 계약은 무효이다. 그러나 이걸 피해자들이 알아도, 위법성을 내세우며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갈 수 있나? 절대 없다. 그놈들은 애초에 불법을 자행하는 조직인데 그걸 알아도 어떻게 빠져나오겠나. 수 틀리면 죽여버리는데. 그러면 과연, 콜센터 직원들은 억울하니까 벌을 받지 않을까? 아니다. 심지어 엄벌에 처한다. 물론 이게 강제 동원을 시킨 건지, 자발적으로 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자금 운반만 해도 실형에 처한다. 결국 재민이라는 역할이 현실에서도 중요한 이유이다. 그는 본인이 살고자 했지만 결국 모두를 살린 것과 다름이 없다.
재민이 나와서 말인데, 이 감상문의 제목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라미란과 공명의 로맨스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스피싱 사기범과 피해자라는 혐오관계에서 총책을 잡기 위해 공조하는 관계를 넘어 덕희는 칭다오까지 넘어가 재민을 구출한다. 이보다 더 완벽한 구원서사가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로맨스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라미란이 맡은 덕희가 굳이 재민을 아들처럼 여기지 않은 것. 심지어 덕희는 진창 같은 삶에도 두 자녀를 끝까지 보호하려 애쓰는 모성애가 강조되는 캐릭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희와 재민의 관계가 피해자끼리의 연대로만 비치게 연출한 것은 이 영화가 가진 큰 장점이다. 재민은 본인이 원해서 사기를 친 것은 아니지만 안 그래도 세탁소에 불이 나서 힘들어하던 덕희에게 청천벽력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재민은 본인이 살기 위해서 덕희에게 저희 부모님도 세탁소를 한다는 둥 감언이설로 꾀어냈다. 이런 놈에게 아들 같아서 그랬다는 서사를 줘버리면 이 영화는 진부하다 못해 쓰레기통에 처박혀야 하는 삼류영화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덕희는 그러지 않았다. 내 돈을 뺏어간 나쁜 놈이지만, 다시 전화를 걸어온 간절한 목소리를 듣고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협력하기로 한다. 그게 썩은 동아줄일 수도 있는데 사기꾼을 다시 믿는 배포 있는 여성이다. 그런데 이런 성별과 나이를 떠난 연대에 대체 무슨 로맨스를 느꼈냐고 물어본다면... 그냥 공명이 너무 귀엽고 잘생겨서 그랬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마지막에 칼에 찔려 숨이 넘어가는데 너무... 하... 내가 덕희였어도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을 듯. 공명한테 관심 없고 그냥 KBS '안녕하세요' 나왔을 때 공감능력이 좋은 배우이군, 하고 넘겼는데 이 영화에서는 지나칠 수 없게 매력이 넘친다. '시민덕희'의 최고 수혜자라고 느껴질 만큼 눈에 총기가 있고 계속 살아있기를 응원하게 만든다. 들킬까 봐, 맞을까 봐, 죽을까 봐 애가 타서 내가 죽겠더라. '극한 직업'에서 막내 형사로 나왔을 때도 귀여웠지만 큰 인상을 남기진 못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완전 멱살 잡고 입덕시킨다. 귀엽게 잘생겨서는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후...
덕희는 한국에서 그저 발을 동동 거리며 재민의 제보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동동거림이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발을 굴러 높디높은 경찰서의 문을 수 차례 두드린다. 덕희는 속은 뒤집어졌어도 좌절하지 않는다. 문제 해결에 대해 적극성이 높은 인물로 재민 역시 덕희의 성품을 알아보고 도움을 청한다. 덕희는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지만 사기 피해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캐릭터이다. 작정하고 덤비는데 누가 안 맞고 넘어갈 수 있을까. 사기는 금전적이라 마치 피해자가 어리석고 가해자는 지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기라는 범죄를 칼부림으로 치환해서 생각하면, 정류장이나 지하철 같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어떤 사람이 칼을 휘두른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 사건에서는 피해자들에게 그러게 왜 칼에 찔렸냐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있더라도 그 사람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사람 목숨이 돈이 되면 반응이 달라진다. 돈을 뺏은 놈은 머리가 좋아서 그런 거고 뺏긴 사람은 바보이다. 작정하고 찔렀는데 칼에 맞아 죽은 사람에게 바보라고 하면 되나? 이런 시선 때문에 피해자들은 돈만 뺏긴 게 아니라 마음도 망가진다. 죽지만 않았지 영혼이 망가지는 일이다. 난 아직 살면서 사기를 당해보지 않았지만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 직접 당한 사람들은 오죽할까. 신용카드 신규발급 전화받고 나에게 불리한 상품을 소개받았을 때 그 정도만으로도 누구에게 낚인 게 몹시 자존심이 상하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근데 실제로 몇십, 몇 백, 몇 천, 몇 억씩 사기당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덕희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아무리 당장 먹여 살려야 하는 자식이 있고 억울해서라도 진실을 밝히고 싶대도 그런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게 실화라는 게 믿기지 않고 그 어떤 영웅 이야기보다 김성자 씨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휴대폰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물건이고,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못 하는 게 없는 세상이다. 나도 언제든 보이스피싱을 당할 수 있고 작정하고 속이면 안 넘어갈 사람 없다고 본다. 피해자는 절대로 멍청하거나 어리석어서 당한 것이 아니다. 사기꾼이야 말로 타인의 선의를 악의로 갚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다. 부디 피해자들이 자신을 탓하고 자기 비관으로 안타까운 결말을 맺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비슷한 방식의 피해자끼리 모여서 단체소송을 낸다든지, 방관하는 경찰에게 행정소송을 건다든지 하는 적극적인 권리구제로 꼭 영혼의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원금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이상 정의실현으로 충분하지 않겠지만 또 다른 피해자가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두들 남의 아픔에 관심을 갖고 도우려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나도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주변에 이런 일이 생기면 덕희를 도왔던 봉림, 숙자, 애림처럼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돕겠다고 다짐했다. 또 내가 덕희같은 입장이 된다면, 꼭 사기뿐만이 아니라 범죄 피해자가 된다면 구제 과정이 힘들더라도 어차피 이판사판. 끝까지 총책을 물고 늘어지던 덕희의 집념을 본보기 삼아 나 말고 또 다른 아픔이 없도록 해야겠다.
두서없는 감상문이었는데 요약하자면 생각보다 잔인해서 폭력적인 것에 트리거가 있는 사람은 관람에 주의하거나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고, 공명 팬이라면 참고서라도 보기를 추천한다. 공명 진짜 진짜 귀엽고 짠하고 잘생기고 주머니에 담고 싶은데 덩치 때문에 안 들어가서 아쉽다. 다행히 군대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대서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 기대가 된다. 아 그리고 이무생도 그렇고 이주승도 그렇고 조연들이 연기를 살벌하게 잘하는데 특히 염혜란 배우는... 진짜 배우계의 서울대. 엘리트 배우 같다. 왜 이리 연기를 잘하는 거야!!! 보면서 왠지 나도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지더라. 근데 맨날 말만 하고 실천을 안 함.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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